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넵스키 (문단 편집) == 생애 == 블라디미르의 대공이었던 야로슬라프 2세의 둘째 아들이며 페리슬라블 잘레스키에서 태어났다. 노브고로드 연대기에 의하면 [[스웨덴군]]이 이조라 강과 네바 강의 합류지점에 상륙하자 1240년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해 네바 강의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 전투로 19살의 그가 [[네바 강]]의 이름을 딴 넵스키(Невский)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꽤나 유명한 전설이다. 그러나 비 러시아 측 기록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실제 역사에서 [[스웨덴]]은 이 당시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부정하고 있다. 한편 1239년부터 [[북방 십자군]]을 수행하던 [[튜튼 기사단]]의 일파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노브고로드 공국 근처로 쳐들어왔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원래는 현재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살던 [[발트족]] 및 [[핀족]] 이교도들을 정복하며 [[가톨릭]]을 전파하는 [[십자군]]을 자처해왔는데, 이번에는 [[동방 정교회]]를 믿는 노브고르드 공국을 이단으로 규정한 뒤 침공한 것이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기사단이 발트계, 핀계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짓밟고 착취하며 정체성까지 말살해왔던 상황에서, 노브고로드 공국마저 리보니아 기사단의 손에 넘어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했다.[* 이들은 개종한 원주민한테도 "응 아니야"를 외치며 칼질을 하던, 성기사 스킨 쓴 침략자 집단이었다.] 1241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먼저 노브고로드의 형제 도시 [[프스코프]]를 점령한 뒤 다른 십자군 기사단원들 및 에스토니아인 징집 농노들과 합세하여 노브고로드로 진군한다. 넵스키의 군대는 숫자는 더 많았어도 리보니아 기사단과 그 동맹군에 비해서 무장이나 전투 경험이 빈약해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대규모 회전은 1242년 4월 5일 페이푸스 호수 위의 빙판에서 벌어졌다. 넵스키는 노브고로드 보병들이 기사단의 돌격에 깔려죽지 않도록, 기사들이 마음껏 돌격하지 못하는 빙판 위를 전장으로 택했다. 그럼에도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무장이 빈약한 노브고로드 공국의 보병들이 기사들에게 밀리며 고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리보니아 기사들의 무거운 갑옷과 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빙판이 깨져 기사들 상당수가 얼음물에 빠져 죽으면서 리보니아 기사단의 주력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고, 뜬금없이 자기편의 최정예 전력이 빙판 밑에 빠져죽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리보니아 기사단 군은 급격하게 사기가 떨어졌다. 보조부대로 데려왔던 에스토니아인 보병들이 제일 먼저 도주하자, 얼음물에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남은 기사들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넵스키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군대는 최정예 대부분이 얼음물 깊숙히 빠져죽어 사기가 곤두박질 친 리보니아 기사단 군을 추격해 만만한 에스토니아인 징집 농노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넵스키는 다시 한번 러시아를 외세의 침공에서 구하게 된다. 패배하고 돌아온 리보니아 기사단은 얼음물에 빠져 죽은 게 창피해서인지, "60배가 넘는 적들하고 싸우다가 기사 20명이 전사했다."라고만 간단하게 적어 놓고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페이푸스 호 전투 당시에는 리보니아 기사 100여명 말고도 400여 명의 다른 십자군 기사들까지 참전한 상황이었으며,[* 참고로 십자군 기사 한 명의 전투력은 셀주크 튀르크 기병 여러명과 맞먹는 것으로 고평가받았고 레반트 십자군 기준으로도 기사들이 수 백명 단위로 전사하면 대패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보조부대로 데려간 에스토니아인들은 대부분 도망가거나 잡혀 죽었다. 리보니아 기사단의 명백한 완패였다. [[페이푸스 호]] 전투가 벌어지던 때는 [[바투]]를 위시한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군에 의해 키예프 루스가 무너지면서 러시아인들 대부분이 생지옥을 겪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브고로드 공국마저 북방 십자군에 의해 무너졌다면, 러시아인들은 더 심각한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훗날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정교회]]에서 [[러시아군]]의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여지며, 위의 [[이콘]]도 그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형인 표트르는 소년기에 일찍 죽었으나 아버지 사후 삼촌인 스비야토슬라프에 의해 밀려나면서 블라디미르의 대공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결국 몽골의 힘을 빌려 1252년 블라디미르의 대공에 취임한다. 이후 그는 일생동안 반가톨릭에 친몽골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국내의 정적들을 견제하는 데 몽골의 권위를 빌리기도 했다. 비쳅스크 공이자 [[폴라츠크]] 공인 브랴체슬라프 바실코비치의 딸과 결혼해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 중 막내아들이자 훗날 '''모스크바의 다닐'''로 불리는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모스크바 대공국]]을 세우며 모스크바 대공의 시조가 된다. 죽기 얼마 전 두 번째 아내와 재혼했는데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